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소라 히바리 (문단 편집) === 활동 === [[파일:external/www.natsumero.com/misoraH.jpg|width=50%&align=center]] [[파일:external/www.rafu.com/misora-hibari-poster.jpg|align=center]] 덕분에 히바리는 어렸을 때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8살의 나이에 데뷔하게 된다. 히바리의 어머니는 전쟁이 끝난 45년에 직접 사재를 털어서 자체적으로 딸 히바리를 위한 소규모 악단과 무대를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지역 공민관 등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8살이었다. 1946년에는 [[일본방송협회|NHK]]의 노래 콘테스트에 참여하여 예선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히바리 모녀는 당연히 예선 합격을 예상했건만 심사위원으로부터 "노래는 잘 하는데 어린이답지가 않다.", "비교육적이다", "빨간 드레스가 좋지 않다." 등 노래와는 별 상관도 없는 이유로 어이없게 탈락하게 된다.[* 미소라 히바리가 전설이 된 후 이 사람들이 어떤 욕을 먹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마찬가지로 저음을 가진 [[나카모리 아키나]]도 "얼굴은 아기 같은 게 어른 흉내를 낸다. 좀 더 아이다운 노래를 부르라."는 평가를 받고 오디션에 낙방한 경험이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문주란]]은 "어른 목소리를 내는 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톱스타가 된 케이스.]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대활동을 하며 인맥을 쌓아나간 히바리 모녀는 1947년에는 지방순회공연에 가수로써 참석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TV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서커스]]처럼 코미디와 노래 등을 전문으로 하는 연예단이 직접 지방을 돌면서 공연을 주최하곤 했는데, 이런 연예단들은 [[야쿠자]]와 같은 폭력조직들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술되는 야쿠자 조직들과의 관계도 이러한 경력이있었기때문이다.], 그 기회를 살려 무대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동년 4월 히바리 모녀는 연예단의 버스가 사고를 당하면서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히바리의 아버지 마스키츠는 이 사고를 겪고 나서 "더 이상 노래 부르는 건 금지"라고 말할정도로 히바리의 무대활동을 반대하게 된다. 하지만 히바리는 아버지의 이런 반대에 "노래 부르는 것을 그만둘 바엔 차라리 죽겠다"고 말할 정도로 격렬하게 반항하였고, 결국 마스키츠는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사고로 한동안 활동을 쉬었던 히바리는 1948년 [[고베]] 마츠자카 극장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연하게 당시 고베를 주름잡고 있던 최고의 폭력조직인 [[야마구치 구미]]의 두목 다오카 카즈오의 눈에 띄게 된다.[* 다오카 카즈오는 당시 홈런 히트 퍼레이드라는 연예단을 직접 운영하며 연예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한 큰 손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때 히바리는 다오카의 마음에 든 이후부터 직간접적으로 다오카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게된다.] 이후 고향인 [[요코하마시]]에서 무대활동을 하던 히바리는, 우연히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이자 배우였던 카와다 하루히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히바리의 무대를 인상깊게 본 카와다는 직접 자신의 옆자리에 히바리를 앉히고는, 히바리에게 가수로써의 여러 노하우를 알려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히바리는 카와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후 수많은 회고에서 "나의 스승은 카와다뿐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카와다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겼다.[* 카와다가 척추 골염으로 힘든 세월을 보낼때 그에게 온정을 베푼게 다오카 가즈오였는데 이런 배경으로 훗날 다오카가 고베 예능사를 설립하자 미소라 히바리는 고베 예능사의 전속 연예인이 되었다.[[https://youtu.be/E-Uj6XRDzjw?si=K56EBx773zUNkiWY|#]]] 연예계의 거물들과의 잇따른 이러한 만남은 히바리가 점차 더 많은 연예계의 유명인들과 만나는 계기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1948년도 중반 쯤 될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활동이 가능해질 정도로 그 유명세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때 "슬슬 연예계 활동을 위한 예명을 지어보는게 어떻겠냐"라는 조언을 받게되었고, 결국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을 짓게된다.[* 본래 히바리의 이름은 카즈에였고, 이전까지만 해도 본명으로 활동하고있었다.] 1949년에는 12살밖에 안 되는 나이로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려나가던 히바리는 처음으로 레코드 취입을 하게 되는데, 이 첫 싱글 레코드가 45만장이나 팔리는 대히트를 치면서 히바리는 본격적으로 전국규모의 유명가수들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히바리는 [[실크햇]]에 [[연미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이 이미지는 관중들에게 상당히 깊이 각인되었는지 한동안 [[실크햇]]에 [[연미복]] 하면 히바리를 연상하는 일이 많았다고한다.]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스타급 가수, 성우[* 당시에는 무성영화가 많아, 가수들이 성우 역할로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로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1952년에는 영화 <과수원>의 소녀의 주제가 <リンゴ追分>를 담은 앨범이 70만장이나 팔리며 당대의 최고판매기록을 갱신하게된다. 이후부터 히바리는 근 40년간 [[엔카]], 나아가서 일본 가요계의 '''여신(女神)'''으로 군림하였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유년시절부터 연예계에서 생활을 해왔던 그녀를 비공식이지만, '''[[1960년대]]의 [[아이돌]]'''로 규정짓기도 하였다.[* [[1960년대]] 당시엔 아이돌이란 개념이나 기준이 아직 일본의 연예계에선 명확하게 규정 및 구현이 되어있지 않았으나, 시기만 따져보면 '''[[야마구치 모모에]]와 [[나카모리 아키나]], [[아무로 나미에]]'''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가희#s-3]] 포지션'''을 맡고있는 초대형 톱스타 아이돌들의 원조격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